설교요약 : 부활의 세 증인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0-18).
부활의 세 증인들
어떤 사람에게는 안타깝고 애절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누군가에는 아무런 의미 없는 물건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부활도 누군가에게는 매년 돌아오는 절기일 뿐일 수 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래서 지금 나의 인생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도전과 의미를 주고 있는지 되돌아보고자 한다.
1) 부활이 두려운 증인
첫 번째 부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두려운 사람들이다.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와 그리스도를 모함하여 죽게 하였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그들이다. 또한 그분을 때리고 조롱하였던 로마 군사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모욕하였던 백성들도 여기에 속한다(막 15:29).
그들은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었음을 확인하였음에도 불안해하였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마 27:63-66). 그들은 진짜로 예수님이 부활하실까 두려워했다. 만약 다시 살아나더라도 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밖에 경비병을 세우고 돌로 인봉하였다.
부활을 말하면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면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삶을 덮기 위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2) 부활이 의미 없는 증인
두 번째 부류는 예수의 부활이 그의 인생에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다. 놀랍게도 제자들이 이 두 번째 부류에 속했다. 예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갔다고 생각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전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요 20:6-7).
성경은 수건과 세마포가 잘 놓여져 있었다고 말한다. 만약 누군가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님의 시체가 마술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잘 개어져 있는 수건과 세마포는 부활의 증거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무기력한 제자들의 모습이 아닐까. 예수님의 부활이 기쁨이 되지도 못하고,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은 아닌지 되돌아보라.
3) 부활이 감격스러운 증인
세 번째 부류는 부활이 감격스러운 사람들이다.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울고 있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만으로도 슬픈데 시신마저 찾지 못하니 통곡한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요 20:11).
제자들이 들여다 보았을 때는 없었던 천사가 왜 우느냐고 마리아에게 물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의 시체를 가져가 버렸다고 말하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누군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다. 그를 동산지기로 생각한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주면 자신이 시신을 가져가겠노라 말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셨다. “마리아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첫 모습을 마리아에게 보이셨다. 그녀를 부활의 첫 증인 삼으셨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 삼으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대인 관습에 여인은 법적 증인 자격이 없다. 그러니 마리아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녀의 말은 어떤 신뢰성도, 법적 효력도 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다.
이는 주님의 부활을 누가 가장 기다렸는가에 대한 답과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너무 귀하고 그분이 죽임 당하심이 너무 가슴 아픈 사람, 예수님과 떨어져서는 한순간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가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부활도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런 감동이 없는 사람에게는 부활도 의미가 없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주님이 대신 졌다는, 그래서 주님이 나 대신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대한 통곡이 없다면 주님의 부활도 의미가 없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될 것을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항상 부활과 연결된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면 우리도 새 생명을 얻을 것이다.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된다. 그리고 부활의 기쁨이 있어야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질 수 있다.
말씀 적용
십자가가 없는 자들에게는 부활도 큰 의미가 없다. 여러분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부활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있는가? 예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인가? 그때 예수의 부활이 기쁨이 될 것이다. 또 그 부활의 기쁨으로 자신의 십자가 질 힘을 얻을 것이다. 나의 이 십자가 끝에도 부활의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