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네 형제와 화목하라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는 가정 8 2007. 7. 22
네 형제와 화목하라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창33:3-4)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에 찔림을 받고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만, 깨어진 형제관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결혼을 해도 부모님을 모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마음에 부모로 남아 늘 부담을 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형제간은 자기 가정을 갖고 흩어지고 나면 마음과 시야에서 함께 멀어지기 때문에 형제끼리 화목하지 못한데도 그것을 고쳐보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제간의 관계 또한 하나님 앞에서 깊이 깨뜨려져서 섬겨야 할 부분입니다.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닥뜨려 다루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I. 본문의 배경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삭과 그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등장합니다. 에서는 사냥꾼으로 남자다운 기개가 있었지만 반면에 야곱은 여성스럽고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더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편애했으니 두 형제가 화목할 리 없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위치는 족장의 위치였는데 이때는 선택된 백성들 가운데 아직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없던 때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족장은 이 세 권한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비는 유언적 축복은 그 축복을 받은 사람에게 그대로 임하는 신적인 효과가 있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 이미 아버지 이삭에게 두 아이가 쌍둥이로 태어나는데 그 동생이 내가 택한 사람이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 둘째 아들보다는 혈통을 따라 장자가 된 큰아들을 편애하였고 어느 날 큰아들을 조용히 불러서 축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서 짐승을 잡아와 맛있게 요리를 해서 자신에게 가져와 축복을 받으라고 이야기를 조용히 건넸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머니 리브가가 듣고는 자기가 사랑하는 둘째 아들을 축복받게 하기 위해서 야곱에게 형의 차림새를 하게 하고 아버지 방에 들여보냅니다. 이삭은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여 야곱인 줄 알지 못하고 모든 축복을 다 해주었습니다. 축복을 받은 야곱이 가고, 뒤늦게 에서가 아무 것도 모르고 찾아왔으나 야곱이 모든 축복을 받은 후였고 아버지께 매달렸지만 모든 축복을 동생에게 해주었기 때문에 너에게는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형의 마음에 동생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에 칼을 갈고 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만 하면 단칼에 이 동생을 죽여 버릴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멀리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자신의 오빠 집으로 보내게 됩니다. 야곱은 거기에서 20여년의 긴 세월동안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재산도 모으고 결혼도 하고 부인들과 아이들을 거느리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야곱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형과 대면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칼을 갈고 마음에 있는 이글거리는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형과 어떻게 대면하겠는가 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II. 얍복강의 화해
그런데 야곱의 염려와는 달리 얍복강에서 형 에서와 대면하였을 때 놀라운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A. 화해의 입맞춤
이 화해의 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창33:4)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화해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안았다”고 하는 것이 반가움의 표시라면, “입 맞추었다”고 하는 것은 애정의 표시이고 “울었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있었던 깊은 앙금들을 쏟아내었음을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답답하기만 하였던 야곱의 마음에는 기쁨이 솟아나게 되었고 복수심에 불타며 분노에 가득 찬 형의 마음에는 동생을 향한 뜨거운 연민이 솟아나게 되어서 실로 형제가 오래간만에, 아니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이 형제가 강가에서 뜨겁게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펑펑 우는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동생이 자신과 아버지를 속여 하나님께 받을 자신의 축복을 빼앗아 가지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아버지께 축복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더니 “동생에게 다 축복해주었기 때문에 네가 받을 축복은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슬피 울며 축복해달라고 울부짖었더니 그 때 받은 축복이 “너는 들사람이 되겠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업이 되신다고 하는 축복이 빠진, 사실상 껍데기 밖에 없는 것을 받게 되었을 때에 이 형의 마음에 맺힌 원한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것을 20년이 넘는 세월동안을 가슴에 한처럼 품고 그리고 이 동생에게 복수할 날을 기다리면서 산 것입니다.
그런데 형 에서의 마음이 갑자기 녹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바로 야곱의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알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였고, 그 통회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녹이시며 화해할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습니다.
B. 네 형제와 화해하라
그러면 여러분들의 형제는 어떻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살아계신 것이라면 자녀가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형제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자식이 장성했을 때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그 부모 앞에서 화목하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실 때가 되어도 자녀들이 삼겹줄 같이 단단하게 연결되어있고 뜨겁게 사랑하니 저희들이 서로 기대어 살면 걱정이 없겠구나 하며 편안히 눈을 감으실 수 있게 해드리는 그것이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의 형제와 화목한지 물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동생으로서 형이 있어서 행복한지, 누이가 있어서 정말 기쁜지, 그리고 여러분들이 누이나 형으로서 동생이 있고 동기간이 있어서 정말 기쁘고 행복한지 자문해보십시오. 이렇게 함께 어울려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족입니다. 한집안에서 함께 산다고 해서 가족이 아니라 함께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결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족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하기를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했으니 여기에서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유대관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마음으로 하나로 묶여진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과 연합 안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족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고 그 때문에 가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C. 하나님과의 관계만큼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가정을 이루며 흩어진 동기간들을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화목을 이루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화목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지 못하는 불화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대부분 자신의 이익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재산 문제,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 돈 문제에서 그러한 것들이 여실히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이익의 문제가 대립이 된 가운데 결국은 형제가 형제를 경쟁상대로 생각을 하게 되고 서로 기대며 하늘나라의 모형을 이루며 살아가야 할 아름다운 가정은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겨우 가족이라는 이름의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대관계는 사실상 다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한데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육체의 자원은 땅으로부터 받고 정신과 영혼의 자원은 하늘로부터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균형을 잃어버리고 육체에 공급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 땅의 자원을 차지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있고 이 때문에 형제들이 서로 다투고 편을 가르고 관계가 깨뜨리며 살아가니 이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의 인생의 추루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으며 그들의 허위(虛僞)의 삶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동안 형으로부터 받은 상처, 누이와 동생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에 남아있던 가족관의 연대를 이룰 수 있는 기본적인 사랑마저 파괴되었으니 어찌 힘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손해 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의 생애였고 빼앗김의 생애였습니다. 당신은 부요한 분이었지만 당신 자신이 다 빼앗겨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신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입어서 구원을 받고 유익함을 얻은 사람들은 또한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유익함을 얻도록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가족들과의 연대와 화합을 이루고 우애를 이루어야겠다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고 하는 마음과 자기이익에 철두철미한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어 가족을 분열시키고 깨뜨리는 것입니다.
무관심 또한 그러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일 년이 지나도 형, 동생, 누나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왕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이상입니다. 여러분들의 동기간이 만나지 않는 그 자체가 여러분들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져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형제들 중에 불신자가 있다면 더욱 만나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한 달, 두 달, 석 달, 심지어는 일 년, 이 년이 지나가도 형제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살아가면서 자신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오늘도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형제들과의 사랑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런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제 사이에 존재하는 상처로부터 먼저 자유로워야 합니다. 칼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이 꽉 차있는 상태 속에서는 서로 화해하고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얍복강에서 칼부림이 일어나고 야곱과 에서, 누구 하나가 피 흘리고 죽어야 했을 비극의 시점에서 오히려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통곡하며 우는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여러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까리따스(caritas)가 이렇게 깨뜨려진 가족관계 속에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을 통해서만 까리따스의 사랑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모든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이 여러분의 변화된 삶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에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깊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야곱을 변화시키시고 변화된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둘이 뜨겁게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가 흐르도록 그들의 관계를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깨뜨려진 형제와의 관계는,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우리 형이 욕심이 많아서, 내 동생이 이기적이어서, 그리고 우리 누나가 경우가 없어서 관계가 깨뜨려졌고, 그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형제간의 관계는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방치된 형제와의 깨뜨려진 관계는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져있다는 증거입니다.
III. 형제와 화해하는 길
그러면 형제와 화해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A. 자기사랑을 버림
첫째는 자기사랑을 버리는 것인데 여기에서 자기 깨어짐이 필요합니다. 원래 야곱은 잔꾀부리기를 좋아하고 약삭빠른 사람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절대 절명의 기회 앞에서 잔꾀를 부렸습니다. 잘못했으면 자기가 형에게 가서 목숨을 걸고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 텐데 먼저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가 형이 400명의 사람을 데리고 자신을 맞으러 온다고 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피할 수 없는데도 또 잔꾀를 써서 자신의 가축을 두 떼로 나눕니다. 한 떼를 먼저 보내고 그리고 상당한 거리를 두어서 두 번째 떼가 뒤따르게 합니다. 그 앞에는 자기가 별로 사랑하지 않는 이런 종들을 다 보냅니다. 그래서 저것을 치면 이 떼를 거느리고 도망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다 보내고 홀로 외로이 얍복강가에 서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하는데 천사가 나타납니다. 이 천사를 붙들고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매달리지만 천사는 그것을 뿌리치려고 합니다. 야곱은 천사를 꺾어보려고 씨름을 합니다. 이것은 호세아 12장 3,4절에 보면 인간적인 고집이었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면서 나를 축복해주기 전에는 갈수 없습니다, 내가 이런 상황 속에 있는데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십시오 하며 매달리는데 이 마음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형 에서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였다는 뉘우침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내가 복을 받겠는가하는 생각, 자기사랑으로 꽉 차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사와 씨름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천사를 시키셔서 환도를 내리치게 하셨습니다. 남자의 모든 힘이 허리에서 나오는데 위골이 되어 힘을 쓰지 못하고 거꾸러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천사를 붙들고 씨름할 힘도 없습니다. 거기에서 결국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울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 깨어짐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깨뜨려지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행복을 잃으면 어찌할까, 자신의 노력으로 쌓은 부,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어찌할까’ 하는 것들이 모두 다 깨뜨려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렇게 형과 불화하고 사는 동안에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리고 내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형의 마음에 안겨주었을까’ 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의 마음에 무너지고 깨뜨려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가족들과의 관계는 가족들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을 먼저 안 여러분들이 깨뜨려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 모든 답이 거기에 있습니다.
B. 은혜가 필요함
누군가와 화목하지 못한 자는 상대방의 결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지만 이 사랑이 없다면 수많은 허물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형제끼리 서로 불화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점들이 우리의 작은 사랑으로 바꾸어지면 좋겠지만 그 결점들은 죽을 때까지 바꾸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에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소유한 신앙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 바꾸어 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 그 자체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당신께 간절히 매달리고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불화하는 형제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 안에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면 은혜가 필요하며, 또 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형제를 우리 힘으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예수의 사랑으로 넘치기에 그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깊이 임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영적인 부모의 마음이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형제를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랑하고자 기꺼이 상처받으려 하고 기꺼이 손해보고 기꺼이 이용당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C. 사랑에 빚진 자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깨뜨려진 가정을 위해서 화해의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 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주시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받았던 하나님 사랑의 빚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에 빚진 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 이제껏 살아온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쓰레기 같은 죄인들인데 하나님이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아무 공로 없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나의 마음속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을 능력도 없을 그때에 주님이 화해와 사랑의 손길을 내미셔서 나를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완악하고 나밖에 모르던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를 깨뜨리셔서 예수의 사랑에 눈뜨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그 사람의 어떠함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하나님 앞에 운명 지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모두 포기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다 주셔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면 우리들이 그 사랑에 빚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무엇을 많이 움켜지고 많이 누리고 내가 행복해지는 것 자체라면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형제들을 위해서, 아직까지도 신앙이 없는 내 형제들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내가 양보하고, 그리고 내가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위나 그리고 자기가 줄 수 있는 어떤 것들 때문에 형제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이기 때문에 그 형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 형제는 참 소중하고 그래서 형을 둔 것 때문에 동생들이 행복하고, 동생 때문에 형이 자랑스럽게 느껴져야 합니다. 형 때문에 행복한 동생, 동생 때문에 행복한 형,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가족들 간의 사랑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그것을 보면서 자랍니다. 우리의 부모가 사랑할 수 없는 가족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노심초사하고 얼마나 많이 양보하면서도 사랑과 평정을 잃지 않고 화목하려고 했는지를 보면서 그러한 것을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깁니다. 가족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포기할 수 없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붙들려고 할 때 우리의 자녀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붙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더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우리가 우리의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고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녹였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을 때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요12:24)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우리를 위해 열매 맺으시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버린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희생과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생명과 은혜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이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깨뜨려지고 썩어지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서는 항상 용서가 있었습니다. 항상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는 용서할 수 없었지만 자기 죄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먼저 더 아는 사람이 더 많이 빚진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먼저 더 안 사람이 더 많이 죄인입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이 적어도 용서를 빌고, 아픈 것이 많아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형제와 깊이 화해하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옵니다.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원수까지 품에 안고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정말 형제를 용서하는 과정은 바로 자기 죽음의 과정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했고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본질은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갔을 때 여러분들이 형제들과 함께 모두 손잡고 ‘우리 가족 안에 아프고 쓰린 날이 많았고 오해와 갈등, 고통의 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사랑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늘가족으로 다시 만났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이혼한 그대에게”(막10:6-9)을 듣고 실천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형제와의 관계 회복이 어떻게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3.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까리따스의 상실은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 말해 봅시다.
4. 형제와 다시 화목하게 될 비결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특히 은혜의 힘에 대해 말해 봅시다.
5.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경험이 형제간의 화목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에 비춰 나누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