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기도로 훈련하심
기도로 훈련하심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1-7).
Ⅰ. 본문해설
누가복음 18장은 기도의 장이라고 불립니다. 특별히 전반부의 두 개의 유명한 비유는 기도생활의 본질과 우리의 의무에 대해 일깨워줍니다. 9절 이하에 나타난 통회하는 세리와 자기의에 빠진 바리새인의 비교가 기도를 할 때 낮아진 마음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지 보여준다면, 1절부터 7절까지의 억울한 과부의 비유는 우리의 기도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그의 이해로 18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적과 같이 우리의 기도 생활의 실천에는 두 가지의 방해물이 있습니다.
Ⅱ. 기도 생활의 방해물
하나는 기도 생활이 자주 끊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쉽게 낙심하는 것입니다.
A. 자주 그침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항상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을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왠지 기도의 결심도 우리 안에서 기도의 지속을 방해하는 것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치 날갯짓은 하지만 날지 못하는 새처럼 쉽게 단속적으로 그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거듭되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자주 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육체의 게으름’과 ‘영혼의 싫증’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중립상태입니다. 타락하고 방탕하기 위해서도 육체의 도움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고 해도 육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육체가 영혼의 어떠함과 자신의 성향에 따라 이바지 할 때 하나님을 위한 훌륭한 인생을 영위해 나가기도 하고, 방탕과 타락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간이 좋은 인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건강하고 잘 준비된 육체가 건강하고 건전한 정신에 의해서 장악된 가운데, 영혼이 육체를 보람 있는 일을 위한 도구로 잘 사용할 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체는 끊임없이 게으름에 빠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으름은 마땅히 행하여야 할 선한 일에 힘쓰지 않으려고 항거하는 육체의 반항입니다. 바로 그때 기도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될 때에 기도 생활은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처는 자신의 게으른 육체를 처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는 일회용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써야 할 섬김의 도구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처서는 안 됩니다. 적절하게 관리를 하면서 이후에도 쓸 수 있도록 소중히 돌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육체가 자기의 마땅한 분량을 넘어서서 게으름을 요구할 때 그것을 냉혹히 꾸짖고 통제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덕이 없으면 성도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육체를 끊임없이 쳐서 복종시키는 예들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자기를 부인하도록 가르치신 예수님의 명령이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던 바울의 신앙고백 등은 우리가 육체의 게으름과 반항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고 게으름을 뿌리 뽑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기도가 그치는 더 큰 이유는 영혼의 싫증입니다. 우리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기도할 마음은 간절한데 육체가 너무 힘이 없어서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하)를 남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네는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싫증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끊임없이 세우는 기도 생활의 실천에 마음을 쏟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영혼은 싫증 속으로 들어가 기도의 의무는 아주 귀찮고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립니다. 어느 한 순간 자극을 받아 기도의 결심이 솟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두 번 더 시도하고는 다시 기도 없는 생활로 접어들게 되는데,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을 흔들어 깨운 뒤 잠깐 일어나는 듯싶더니 이전보다 더 깊은 잠에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싫증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영혼이 싫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마치 장작과 치열한 불길과 같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끌고 가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집적입니다. 그래서 우리 지성 속에 비치게 될 때 하나님의 성품과 성품이 행사되는 아름다운 지식을 전달해주고 이 지식들은 아전에 몰랐던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환경이 육체의 원기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우리의 영혼을 위한 훌륭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올바로 충분히 섭취할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격하고 싫증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한 열렬한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을 뜨겁게 할 때 우리는 지식이라는 장작에 불붙는 불길을 만나게 되고 이것 또한 우리의 영혼의 싫증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귀한 도구가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기도생활은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성령의 은혜 안에서 내면이 새로워지는 경건의 실천이 없이는 누구도 기도 생활이 단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B. 쉽게 낙심함
다음의 방해물은 쉽게 낙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똑같이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생활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외부의 환경에 대해서 바위처럼 객관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환경을 볼 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이 상상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성향이나 상태를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똑같은 새소리를 듣고 누구는 운다고 하고 누구는 노래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낙심은 객관적인 시련과 고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해석함에 있어서 믿음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믿음 바깥에서 해석하며 하나님을 열렬히 찾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해석에 기운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낙심을 핑계 삼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환경이 열렬한 기도생활에 방해가 될까요, 아니면 도움을 줄까요? 또 시간적 여유가 있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상태가 마음을 쏟고 기도하기에 좋을까요, 아닐까요?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획일적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련과 고난이 닥치자 기도를 할 수 없게 미끄러지고, 어떤 사람은 더욱 열렬한 기도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기도의 정신적인 동기는 바깥의 환경뿐만 아니라 내면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낙망과 낙심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우리는 외부의 상황에 의해서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상하기 쉬운 맛난 음식과 같습니다. 음식을 오래두고 섭취하기 위해서는 소금에 절이거나, 끓여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음식이 썩는 데는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하물며 우리의 마음은 음식보다 훨씬 더 부패하기 쉬운 실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잘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하던 마음으로 한순간에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Ⅲ.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기도함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억울한 과부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 기도한 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억울한 과부는 무엇인가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되는 원한을 품을만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징벌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들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끊임없이 그에게 나아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간구했습니다. 얼마동안 악한 재판장이 힘없는 과부의 소원을 멸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이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여자를 옳게 재판해 주지 않으면 나를 계속 성가시고 귀찮게 할 게 분명해!“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악한 재판장이라도 법을 책임을 질 사람이라면 이런 결론에 이르는 데 하물며 너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너희와 언약을 맺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그분께 간절히 매달리기만 한다면 선한 뜻으로 너희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라고 교훈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과부처럼 매달려 기도하기 전에 너희는 먼저 너희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거라 하는 권면을 듣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제대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기도의 세계를 넓힐 수 있습니다. 곧 기도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지식의 마음은 나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세계는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기도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애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많은 교리를 배우고, 수많은 책을 읽고, 많은 설교를 들었는데도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더라도 열렬히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생활을 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전자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자는 기도하지 못하고 후자는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현재성’과 ‘기도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렇게 기도의 현실적인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과거적이고 지성의 창고 속에 쌓여져 있는 지식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속에 현재화되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 터 위에서 기도를 열렬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있어서 이러한 이치를 가르쳐주시기 위해 이해하기 힘들게도 기도를 원한을 풀어주는 감정에 비유하셨습니다.
Ⅳ.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사실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품는 원한은 비록 그가 원수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원한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주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감정의 질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원한의 감정의 질과 유사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유사성은 바로 ‘집중’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도의 제목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집중함이 있을 때에 그의 기도는 열렬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감정이 있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마음에 뜨거운 아픔이 되어 간절히 외치지 않고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되는 가슴 저리는 기도의 제목이 여러분 속에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술에 있어서도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야한다는 사실을 일반은총의 차원에서도 알거늘 기도라고 하는 특별한 은총과 경건의 영역에 속하는 일들을 수행할 때 마음에 집중 하고 원한에 맺힌 것 같은 감정이 없는 것은 기도생활을 허공중에 흩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한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타오르는 집중의 마음이 없을 때 예배로 모여도 예배가 아닙니다. 기도하지만 단지 중얼거림입니다. 봉사하지만 취미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의 원한을 풀어주겠는데 인자가 올 때 나를 찾는 원한을 품는 것과 같은 기도를 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기도에 집중하지 않고 바람을 떠도는 낙엽처럼 파도를 타고 떠도는 물거품처럼 생각 없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화, 가족 구원, 나라와 민족에 대한 기도 등 어떤 것도 좋습니다. 문제는 기도의 제목만 생각하면 마음이 타도록 심령이 녹아내리고, 무릎을 꿇기만 하면 나는 없는 것 같고, 내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제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Ⅴ. 결론 : 하나님께 집중하라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원한에 사무치신 기도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하나님이신 그분이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도 없고 흠도 없으셨지만 당신이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많은 죄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이렇게 마음이 녹아내리는 경건을 경험하지 않으면 결국 여러분의 마음도 이전의 은혜와는 상관없이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아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꺾임과 복종을 포함한 모든 작용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일어나는 시기는 바로 기도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문제를 보여주고 문제 극복의 무기를 들려주지만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우리가 기도 속에서 의지를 가지고 말씀과 더불어 우리 자신과 싸울 때 일어납니다. 성령님이 죄를 이기게 하시고 본성을 바꾸시는 신령한 작용을 전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아도 그 말씀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적으로 내 마음 속에 역사하는 말씀의 정동을 따라서 우리들이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배교의 전에 역사 속에서는 항상 먼저 하나님을 향한 싫증이 있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런 원한과 같이 사무치는 집중을 배제하는 안일한 생활이 있고, 이 속에서 교회는 기도의 영을 다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한 교회에 타오르는 기도의 불길은 한 신자 한 신자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원한 맺힌 불꽃의 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집중되지 않는 모든 신앙생활을 두려워하고 마음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바치려고 온전히 애를 써야 합니다. 그때 신자의 모임은 예배가 될 것이고, 중얼거림은 하나님을 향해 오르는 향현이 될 것입니다.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기도에 온전히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