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신령한 자의 판단
Ⅰ. 본문해설
오늘 본문에서는 육에 속한 자와 대조되는 신령한 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육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의 대조는 복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생각대로 생각하는 자로 이 세상의 지혜만을 믿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생각을 미련한 것으로 본다.
Ⅱ. 신령한 사람
A. 원어: ‘프뉴마티코스’
프뉴마는 영, 성령을 의미한다. 이 성령은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에 나오는 ‘신’과 같은 용법의 단어이다. 즉, 프뉴마티코스는 영에 속한 사람, 성령적인 사람 정도의 뜻이 된다. 반면 육에 속한 사람은 본성에 매여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인간에게 있는 영과 육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는 정신적인 작용을 하는 동안 우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력에는 판단력이 존재하는데, 이 판단력은 자연적인 판단력과 도덕적인 판단력이 있다. 자연적인 판단력은 ‘꽃이 피기 전에 열매가 맺힌다.’와 같이 사고와 판단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덕적인 판단력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며, 진노하신다.’와 같은 신령하고 영적인 판단력을 일컫는다. 자연적인 판단력이 매우 뛰어나 이 세상에서 똑똑하며 명석한 머리를 가진 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꼭 도덕적인 판단력에 있어서 이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자연적인 판단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고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에 속한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다.
B. 이 표현의 의미
이처럼 자연적인 판단력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계시의 말씀을 성령에 속한 사람은 믿고 고백하는데, 이들이 이렇게 변화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변화는 3가지의 요소를 동반한다. 첫째는 계시의 말씀으로, 이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온 경험이 다른 지체들도 그들이 고백하는 진리는 동일하게 하나이기에 함께 기뻐하며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두 번째는 성령이다. 거듭난 모든 자는 성령을 받은 자로, 이것은 공동체 속에 부어진 영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통치 가운데 각자가 그 유업을 받게 되는 것은 이 성령의 은혜인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은 자도 성령에게 붙들린 정도에 따라 그 모습은 다를 수 있다. 성령에 의해 더 크게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세 번째는 믿음이다. 비신자들은 그들의 판단력을 신뢰하기에 인간의 좁은 판단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믿음을 지닌 자들은 그들의 판단력을 신뢰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들은 인간의 오성의 한계를 인정하는데, 우리가 정직하게 인간 오성의 한계를 생각해 본다면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이성으로 알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만을 너무 신뢰한 결과인 것이다.
Ⅲ. 신령한 사람의 특징
신령한 사림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성품에 대해 알고 있다.
A. 하나님에 대한 앎
1. 존재에 대해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확률을 의지하는 믿음과는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의존,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전적인 포기, 자신의 영혼과 운명을 전적으로 그분께 맡기는 영혼의 활동이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가져온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을 때 또한 그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성품에 대해
우리는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의 발현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가 어떠한지 거꾸로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예전에 한 신학생이 있었다. 그는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고민중에 있었다. 이러한 처지를 알고 있던 그의 친구는 신학생들을 섬기고 계시는 집사님을 알고 있어 그분께 찾아가 부탁을 드리게 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 집사님은 “내가 지금 돕고 있는 신학생들도 많은데, 꼭 그 친구까지 도와야 겠냐!”라며 싸늘하게 거절을 하셨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돌아선 집사님이 이후에 홀로 기도를 하시는 데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본인이 많은 사람을 돕는다는 이유로 이 신학생에게 싸늘하게 거절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반함을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삶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그 분의 성품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존재가 어떠한지 깨닫게 되면서 그분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앎이다.
B.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앎
성경이 우리에게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라.”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붙들며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게 되고 이미 내게 행하신 일들을 보며 그분의 성품에 대해 알게 되며 또 앞으로 내게 행하실 일들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알게 된다. 하나님은 동일한 성품으로 우리를 선대하시기에 더 믿음으로 행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앎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앎이지, 세상적인 지혜의 앎과는 다르다.
C. 앎의 이유: 영적 사고
이러한 앎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신령한 사람은 끊임없는 하나님에 대한 앎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끊임없는 앎의 이유는 영적인 사고 때문이다. 인간이 초자연적인 신비인 영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끊임없는 영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깨닫게 된 앎을 학문적으로 잘 연마하여야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더욱 정교해지고 또한 우리의 깨달음도 풍부해진다. 이는 바울이 그가 체험한 진리를 정교한 그의 지식을 사용하여 로마서를 쓴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앎은 신령한 자만이 알 수 있되, 깨달은 진리를 연구하고 배우는 일 또한 필요하다.
Ⅳ.결론: 진리와 성령 안에서 사는 행복
신자가 된 우리는 믿음이 강물처럼 밀려올 때 가장 행복하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들게 되고 진리를 붙들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성령이 주시는 넘치는 기쁨이다. 이러한 온전한 믿음 위에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를 배우게 되면 우리는 참 진리를 깨달아가는 기쁨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이 모든 행위는 아름답게 엮어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예배자로 설 수 있도록 돕게 된다. 이처럼 참되게 진리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는 오직 이 은혜만으로 만족하며 살게 되고 이러한 자는 신령한 자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령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