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무지한 입술, 폭력이 된 진리
무지한 입술, 폭력이 된 진리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욥 11:1-12)
욥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자 어느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들은 고난이라는 삶의 문제 앞에서 자신이 속한 부류의 견해를 대표한다.
먼저 ‘욥’은 하나님이 인정할 만큼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건한 삶과 고난이라는 현실 속에서 처절하게 항변하며 괴로워하는데,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대변한다.
‘엘리바스’는 오랜 삶의 경륜과 신학적 지식, 영적 체험까지 겸비한 인물이다. 이는 신학적 지식과 이론으로 성도들의 고난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고난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이론가들이다.
‘빌닷’은 조상의 전통과 인간의 다양한 사회 경험을 통해 얻은 현상적 지혜를 많이 알던 사람이다. 그는 고난당한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알고 있고, 그들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아는, 전통과 통계에 능한 사람이다. 빌닷은 한 사람의 특별한 상황을 일반화된 원리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가장 쉬운 오류가 빌닷의 오류일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경험과 신학적인 통계, 어떠한 기준에 누군가를 몰아넣고 그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다. 그러나 통계는 어떠한 경향을 보여줄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진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전통은 지혜를 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해석할 수는 없다.
이에 비해 ‘소발’은 특별한 신학적 지식이나 논지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것을 벗어나면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앙의 극단주의자들을 대표한다.
세 친구 가운데 소발이 마지막으로 나선 것으로 보아 아마 가장 연소하였을 것이다. 또한 대화의 세 사이클 가운데 오직 두 번만 등장하기에 말을 가장 적게 한 사람이다. 그가 말을 적게 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엘리바스나 빌닷에 비해 인생 경험이나 신학적인 지식이 현저히 부족했기에 말을 적게 할 수밖에 없었다. 소발에 대한 이러한 대략적인 이해를 토대로 소발의 첫 번째 대화를 살펴보자.
11장에 나타나는 소발의 말은 9-10장의 욥의 말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에도 공의롭고 정의롭다는 빌닷의 말에 대해 욥은 하나님이 까닭 없이 자신을 학대하심과 온 세상이 불의한 자로 가득 찬 것을 증거로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한다. 이러한 욥의 말에 소발은 분노하면서 그를 모욕하고 조롱하기 시작한다. 욥기 11장에 나타난 욥을 향한 소발의 대답은 다음과 정리할 수 있다.
1. 욥의 말에 대한 모욕(1-3절)
2.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한 모욕(4-6절)
3. 욥의 인격과 생명에 대한 모욕(7-12절)
4. 회개의 촉구와 저주(13-20절)
욥의 말에 대한 모욕(1-3절)
먼저 소발은 욥의 많은 말에는 어떤 진실도 담겨 있지 않은 헛소리라고 조롱한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욥 11:2-3).
실제로 욥이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하고 그의 말 속에는 고난에 대한 한탄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기에 이 모든 말이 소발에게는 헛된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욥의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욥의 많은 말은 그저 허공을 외치는 헛된 소리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소발의 모욕과 비난은 욥의 말을 넘어 그가 당하는 고난까지도 공격하기 시작한다.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한 모욕(4-6절)
욥의 많은 말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한 소발은 이제 그가 당하는 고난은 그의 죄에 비하면 오히려 강도가 약하다며 그의 고난을 모욕한다.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욥 11:4).
소발은 욥의 긴 항변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한다. “너는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고 말하는구나.” 사실 욥은 자신이 깨끗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이렇게 심각한 고난을 당할 만큼 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의 상황을 전혀 공감하지 못한 상태로 그의 말을 들으니 욥이 자신의 정결함을 자랑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을 토대로 이제 소발은 욥이 당하는 고난을 모욕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욥 11:5-6).
지금 소발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욥의 죄의 일부를 용서해 주셨기에 욥이 이 정도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6절에서 소발은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라고 말하는데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시는 것은 두 갈래로 나뉘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편으로 인간의 죄를 그의 죄만큼 심판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죄는 용서하시고 가벼운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욥에게는 그의 죄보다 약한 형벌을 주셨으니, 본래 욥은 더 극심한 고난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소발이 왜 이렇게 비정한 사람이 되었는가. 선입견을 가지고 욥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소발은 이미 욥을 죄인이라고 단정했기에 그의 탄식을 아픔의 절규를 듣지 못한 것이다.
욥의 인격과 생명에 대한 모욕(7-12절)
이러한 소발의 비정함과 무지는 결국 욥의 삶을 비난하는 말로 이어진다. 소발은 욥이 얼마나 비천한 사람인지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강조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욥 11:7-10).
지금 소발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모두 사실이고 진리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행하심을 인간은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마저도 그 목적이 선하지 못할 때는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의 도구로 변할 수 있다.
소발은 하나님의 전능을 욥의 인생을 비하하고 저주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 구절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욥 11:11-12).
소발이 하나님의 크심과 높으심을 언급한 이유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욥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소발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욥을 ‘허망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허망하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베’로, 시편 127편에 나오는 ‘헛되다’이다. 곧 ‘가치 없다’, ‘쓸모없다’라는 뜻이다.
결국 소발은 욥의 모든 삶이 하나님 없이 집을 세우고자 한 것처럼 쓸데없는 수고였고,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는 삶을 스스로 지키려는 파수꾼처럼 헛된 삶이었다고 욥의 인생을 폄훼한다.
그리고 소발이 마지막으로 내린 욥의 인생의 평가는 참으로 참혹하다. 12절을 히브리어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렇다. “그러나 텅 빈 (머리가 빈) 사람은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들나귀가 사람에게서 태어난다면.”
이 표현은 상당히 시적이기에 고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소발의 말을 현대어로 바꾸면 이렇다. “그러나 머리가 텅 빈 욥과 같은 사람은, 사람이 들나귀를 낳은 것처럼 아무것도 모른다.”
욥은 머리가 텅 빈 사람, 그리고 사람이 낳은 들나귀 새끼라고 모욕한다. 욥을 언제 어디서 태어나는지 모르는 들나귀 새끼에 비유하며 그의 인격과 생명을 모독한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소발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인용한다.
들나귀 새끼와 같은 욥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움을 알지 못하고 고난을 주셨다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너무나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 욥은 머리가 텅 빈 짐승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무지한 자의 입에서 교만한 말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을 모욕하고 능멸하는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신학도 이렇게 사용될 때가 있다. 이웃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갖지 못하고 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진리는 때로 무서운 채찍이 되어 한 사람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주는 도구가 된다.
회개의 촉구와 저주(13-20절)
이렇게 욥에게 모욕과 저주의 말을 쏟아낸 소발은 다른 친구들처럼 동일한 결론으로 그의 대답을 마친다.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욥 11:13-14).
소발은 욥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고, 만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욥의 삶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욥 11:16-18).
우리는 회복은 회귀, 회개, 회복이라는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미 배웠다. 그런데 소발은 욥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고, 욥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말한다. 소발은 ‘회귀’를 놓치고 있다. 무너진 자리로 돌아가 그것을 보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해야 하는데, 욥에게는 회귀할 죄악의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욥에게는 회개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신다는 친구들의 말이 설득력있게 들리지 않았다.
맺음말
소발은 욥에게 들나귀 새끼와 같고 머리가 텅 빈 사람과 같이 무지한 자라고 비난하였으나 정작 무지한 사람은 소발 자신이었다. 소발의 가장 큰 실수는 욥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절대화하여 그에 미치지 못하는 욥의 말과 고난, 그리고 삶 전체를 모욕하고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발의 말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의 상황과 처지를 공감하며 들어야 그 사람의 말의 의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무지한 사람은 자신만이 옳다는 교만에 이르게 되고, 교만한 자의 입에서는 진리는 폭력의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과 공감하고 있는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있는가. 그때 우리 입에서 나가는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