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삶을 망치는 두 가지 습관
삶을 망치는 두 가지 습관(20251102)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6:1-11)
보증과 게으름의 문제
아버지는 5장에서 음녀의 치명적인 유혹과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아내의 사랑에 대해 말하였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아버지가, 음녀의 파괴적인 사랑을 아내의 생명력 있는 사랑과 비교하거나 혹은, 아내의 사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소 뜬금없는 보증과 게으름이라는 문제를 거론한다. 그리고 음녀는 6장 20절 이후에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본문은 문맥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보증과 게으른 삶은 또 다른 형태의 음녀의 유혹인 것이다. 보증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에 대해 내가 마치 주인인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하는 것이고 게으름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시간을 자신의 것인 양 주인 노릇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재물과 시간에 대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아들을 교훈한다.
잘못된 선택1: 보증
먼저 아버지는 1절에서 아들을 부르며 잘못된 선택인 보증에 대해 가르친다. 아내를 얻어 가장이 된 후 절대 하면 안 되는 선택이 바로 보증인 것이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잠 6:1)
아버지는 1절에서 보증의 두 가지 형태를 말한다. 첫째는 ‘이웃을 위해 담보하며’라는 구절에 등장하는 보증이다. 이는 이웃이 빌린 돈이나 재물에 대해 자신의 자산이나 신용을 바탕으로 지급 약속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은 공동체 중의 한 사람이다.
둘째 ‘타인을 위해 보증하다’라는 구절에 등장하는 보증이다. 이 구절의 히브리 성경의 의미는 ‘외부인을 위하여 너의 손을 쳤다면’인데, 여기서 ‘손을 치다’라는 문구는 어떤 계약이 성사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보증을 서는 대상은 구제와 긍휼의 대상이 아닌 사람, 법적 책임이나 사회적 관계가 없는 외부인(타인)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책임지거나 도와줄 의무가 없는 사람을 위해 보증을 서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다. 이것은 율법이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는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들이 만약 돈을 갚지 못하면 먼저 집과 재산을 압류하고 후에 자녀를, 아내를, 그리고 당사자를 종으로 잡아갔다. 그래서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은 ‘하나님이 네게 허락하신 것 이상의 계약했다면’이다.
여기서 ‘이웃’, ‘외부인’이라는 두 단어는 양 극단을 말하면서 전체를 말하는 히브리 문학 기법이다. 곧 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보증을 서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증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이렇게 말한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 6:2)
‘얽혔다’ ‘잡혔다’라는 단어는 모두 짐승이 올무나 함정에 걸린 것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아버지는 보증을 선 것을 짐승이 올무에 잡힌 것과 비교한다. 그리고 사람을 올무와 함정에 빠지게 하는 보증을 빨리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잠 6:3-5)
아버지는 앞에서 보증 선 자를 올무에 잡힌 짐승이라고 하였는데(잠 6:2), 이제는 사냥꾼에 붙잡힌 짐승의 상태라고 말한다(잠 6:3-5). 그리고 사냥꾼에서 손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전하는데, 그것은 보증을 선 사람에게 가서 겸손히 청하여 보증을 취소하는 것이다.
한번 선 보증을 취소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올무에 잡힌 짐승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어떠한 수모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보증만은 취소하라고 당부한다. 그때까지는 잠도 자지 말라고까지 경고한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하여 보증을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가 이렇게 보증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증은 고대나 지금이나 가장 소중한 가정을 일순간에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고대에서 보증을 선 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갚지 못하면 하나님의 주신 재물뿐만 아니라 자녀와 배우자, 본인까지 종이 될 수 있는,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하는 것이었다.
지혜는 우선순위를 지키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이 지혜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바라보시는 것이 가정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명목 아래 가정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제 가장이 된 아들에게 가장 먼저 보증을 서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보증서지 말라는 본문의 아버지의 경고와 이웃이 무언가를 꾸러 오면 마땅히 그를 도우라는 3장의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고민이 된다. 3장에서는 이웃을 도와주라는 아버지가 6장에서는 절대 보증을 서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구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 가운데 일부를 나누어 주는 것이고, 보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 이상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웃이 경제적 도움을 요청한다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도와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 이상을 약속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 이상을 약속하는 순간 내가 하나님이 주신 자녀, 아내, 가정, 재산의 주인 노릇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가정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잘못된 선택2: 게으름
보증이 지혜로운 자가 피해야 할 첫 번째 선택이라면, 게으름은 보다 실질적인 면에서 우리가 피해야 할 두 번째 선택이다.
그런데 잠언에서 말하는 게으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그 개념이 다르다. 우리는 보통 게으르다고 하면 동작이 느린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성경에서 게으름은 ‘하나님의 시간보다 늦는 모든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세우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과 장소에서 특별한 일이 이루어지게 한신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신다.
그런데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유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게으름은 하나님의 시간에 뒤처지는 것을 말하고, 게으름의 반대는 하나님의 시간보다 빨리 달려가는 조급함이다. 하나님의 사간에 맞추고자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부지런한 자이다.
게으르지 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6장 6-11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6-8절은 개미를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것이고, 9-11절은 게으른 자는 결국 빈궁과 곤핍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
6-8절에서 아버지는 개미를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한다. ‘그가 하는 것을 보고’의 정확한 의미는 ‘개미의 길을 보라’이다. ‘길’은 잠언에서 삶의 방식을 뜻하기에 아버지는 게으른 자들에게 개미가 사는 방식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이 세워놓은 창조 질서를 통해 지혜를 얻으라는 것이다.
개미는 하나님의 창조 시간을 맞추기 위해 두령과 감독자, 통치자가 없어도 성실히 먹을 것을 준비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가 창조의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면 개미보다 못한, 어떤 면에서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마치 시간의 주인인 듯 내가 나의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면 결국 빈궁하고 곤핍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먼저 아버지는 개미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말한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잠 30:24-25). 그러나 그들은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갖고 있다. 우리가 개미에서 배워야 할 것은 창조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지혜다. 그래서 일을 해야 할 때 하지 않는 자보다 개미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더 순종하며 살아간다.
이제 아버지는 개미의 비유에서 게으른 인간의 삶으로 관심을 바꾼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잠 6:9-10)
9절의 ‘어느 때까지는’ 히브리어 ‘아드마타이’로, 게으른 자를 질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어느 때까지라는 아버지의 말에 게으른 자는 ‘좀 더’라고 변명한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누워 있자.’
게으름은 항상 시간과 연결된다. ‘조금만 더’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시간의 주인 노릇해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의 시간에 맞추어야 하는데, 조금 있다가 이 일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혹은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증이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게으름은 인생을 파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라는 추수의 때와 여름이 있다. 창조 질서에 따라 곡식을 준비해야 하는 추수 때, 여름이라는 정해진 시간에 일하지 않는 자는 게으른 자다. 그러면 우리는 창조의 시간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 인생에서 점점 줄어들게 된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잠 10:4-5)
아버지의 게으름에 대한 마지막 경고는 게으른 자들의 운명에 대해서다.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6:11)
게으른 자의 운명은 ‘빈궁’과 ‘곤핍’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시간을 미루니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엉겅퀴와 가시나무로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다(잠 24:30-34).
이러한 게으름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능력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시간을 주신다. 그리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다. 하나님의 시간에 그곳에 도착하기를,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미룬다. 그러면 여름이 지나고 추수 때가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없는 빈궁한 삶을, 겨울에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그러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맺는말
보증은 가정을 망치고, 게으름은 우리의 삶을 망친다. 보증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그것을 지키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족의 원리가, 게으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그래야 여러분의 삶이 무너진 포도밭, 황폐한 밭과 같은 멸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