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생의 끝에서 고난을 바라보니
생의 끝에서 고난을 바라보니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욥 19:23-29)
빌닷의 욥을 향한 저주(18장)
오늘은 욥과 빌닷의 두 번째 대화를 살펴보자. 이들의 대화는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다 결국에는 서로에게 죽음의 저주까지 쏟아내며 극한 대립을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는 이전보다 내용이 빈약하고 표현은 더욱 거칠다. 먼저 빌닷은 18장에서 욥의 말이 많음을 질책하며 욥을 향해 멸망과 죽음의 저주의 말을 한다.
1) 욥의 말과 태도를 비판(1-4절)
먼저 빌닷은 욥이 너무 많은 말을 한다고 비판한다.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욥 18:2).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짐승만도 못하다는 욥의 말을 기억하며 욥의 태도를 질책한다.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욥 18:3).
2) 욥을 향한 저주(5-21절)
이렇게 욥의 말과 태도를 질책한 빌닷은 이제 본격적으로 저주의 말을 한다. 먼저 빌닷은 네 가지 비유를 통해 욥의 죽음을 저주한다.
첫째, 빌닷은 욥을 꺼진 불에 비유한다.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욥 18:5-6).
빛은 생명이고 어둠은 죽음이라는 고대의 인식 속에서 그의 삶을 의미하는 장막은 빛을 잃고 어두워졌으며 장막 안의 등불은 꺼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욥의 육체의 생명이 곧 죽음을 맞아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저주의 말이다.
둘째, 욥을 덫에 잡힌 짐승에 비유한다. “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욥 18:8-10).
빌닷은 욥이 덫과 올가미에 잡힌 짐승으로 곧 생명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덫과 올가미는 다른 사람이 놓은 것이 아니라 욥 스스로 미련한 꾀에 빠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욥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변명하고 반항한 결과라고 말한다.
셋째, 욥을 도망다니는 포로로 비유한다. 원수에게 쫓겨 도망하는 포로와 같이 욥이 무서운 질병에 걸려 몸이 병들고 사망의 장자와 공포의 왕에게 잡혀 죽음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욥 18:11),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욥 18:13-14).
넷째, 욥을 뿌리째 마른 나무에 비유하는 것이다. 유황이 뿌려진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과 같이 욥의 인생이 그렇게 심판 받을 것이라고 저주한다.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욥 18:15-16).
3) 욥의 죽음 이후를 저주(17-21절)
이렇게 욥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저주한 빌닷은 이제 죽음 이후의 욥을 저주한다. 욥이 죽은 후에 누구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의 후손은 남지 않아 그의 가문은 멸절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욥 18:17),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욥 18:19),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욥 18:21).
빌닷의 이러한 저주는 참으로 공포스럽고 폭력적이다. 이는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죽음을 전제로 바라본 고난(19장)
19장은 이러한 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다. 욥은 그의 답변에서 친구들에 대해서는 서운함을, 하나님을 향해서는 억울함을 눈물로 호소한다.
1) 친구들을 향한 고백(1-6절)
먼저 욥은 친구들을 향해 서운한 마음을 토로한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욥 19:2-4).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억울한 마음도 호소한다.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욥 19:6).
빌닷은 앞에서 욥의 스스로 놓은 덫에 걸렸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스스로 던진 그물에 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물에 잡힌 억울한 사람이라고 항변한다.
2) 공격하시는 하나님(7-12절)
그리고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억울하게, 폭력적으로 공격하시는지를 8절에서부터 말한다.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욥 19:8-12).
하나님은 욥의 영광을 거두시고 관모를 벗기셨다. 이는 전쟁 가운데 패배하여 쫓겨다니는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막에 유황을 뿌려 나무를 마르게 한 주체도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마치 무서운 군대가 파괴하려고 다가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항변 속에는 욥이 당할 죽음이 죄인에게 주어진 마땅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주신 고난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3) 사람들의 외면(13-22절)
하나님의 공격과 함께 욥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사람들의 외면이었다. 욥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욥을 버리고 떠나갔다.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욥 19:13-15).
형제들, 지인들, 친척들, 종들마저 그를 외면하고 멀리 떠났다. 그뿐만 아니라 아내와 형제, 친구들마저 그를 싫어하고 원수로 여겼다.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욥 19:17-19).
여기서 ‘가련하게 여기다’는 ‘업신여기다’의 의미이고, ‘내 허리의 자식들’은 ‘나의 (어머니의) 태의 자식들’이라는 뜻으로 친형제들을 가리킨다. 아내로부터 형제들, 이웃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욥이 고난 당할 때 그를 버리고 원수로 여겼다.
이러한 한탄의 마지막 부분에서 욥은 친구들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한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욥 19:21-22).
4) 죽음의 끝에서 고난을 보니
이렇게 욥은 자신의 현실에 대한 한탄과 친구들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고 이제 자신의 소망을 말한다. 욥은 빌닷의 죽음의 저주를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죽은 이후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자신의 말이 기록되면 좋겠다는 소원을 드러낸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욥 19:23-24).
이렇게 죽음이라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그는 한 가지 큰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무도 자신의 억울함을 이해해주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위한 대속자가 살아 계시고 마침내 그 대속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는 소망이었다. 이전의 욥은 자신이 스스로 억울함을 풀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 고난을 바라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대속자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
여기서 대속자는 ‘기업 무를 자’ 곧 히브리어로 ‘고엘’이다. 나오미의 가문의 모든 남자들이 죽고 없을 때,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 나오미의 삶을 회복시켰을 때 사용된 단어이다. 또한 이 고엘이라는 단어는 보아스와 룻이 낳은 오벳을 통해 나타난 다윗, 그리고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날 구원의 소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욥은 죽음 앞에서 그의 고엘이 살아계시고 죽은 후에라도 고엘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욥은 살아서든지 죽어서든지 그 고엘을 반드시 볼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27).
우리는 19장 23절부터 고난을 바라보는 욥의 태도가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억울해하던 욥이 빌닷의 저주를 듣고도 반격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난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하나님이 어느 날에는 자신의 구속자가 되실 것이고, 자신은 죽은 후에라도 그 구속자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리라는 소망을 품게 된 것이다.
욥의 이러한 변화 중심에는 빌닷이 퍼부은 죽음의 저주가 있었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욥은 자신의 구속자를 기다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
맺음말
누구나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죽음은 모든 사람의 마지막이고 한계이다. 그러나 죽음은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삶을 값지게 한다. 죽음을 통해 고난을 바라보면 고난 역시 삶의 일부이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이지만 그래도 살아있기에 경험할 수 있는 현실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를 고난 속에서 당황하거나 조급하게 만들지 않고 여유를 준다. 그 죽음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의미 있고 값진 삶의 현실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