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불평이 불신이 되어
불평이 불신이 되어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욥 7:11-21)
모든 사람이 고난을 안고 살아간다. 이는 엘리바스의 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욥 5:7). 불을 지피면 반드시 불꽃이 위를 향해 날아오르듯 인간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한 고난도 항상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은 고난 중의 성도가 아픈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기를 바라신다.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원망의 말도 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고난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절망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는 간섭과 구속이 되어 우리를 불신의 길로 인도한다.
본문 배경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에서 욥의 말은 큰 틀에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전반부에서 욥은 죄를 회개하라는 친구들의 말에 자신의 결백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러다 후반부에서는 친구들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 항변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욥의 첫 번째 대화도 이러한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6장 1절-7장 6절에 이르는 전반부는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대답이고, 7장 7절-21절에 이르는 후반부는 하나님께 대한 항변과 탄원을 담고 있다. 먼저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대답을 살펴보자.
엘리바스를 향한 대답(6장 1절-7장 6절)
1) 고난의 무게와 원인
욥은 가장 먼저 자신이 당한 고난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말한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욥 6:2-3).
욥은 자신의 고난이 당시 가장 무겁다고 여겨지는 바닷모래보다 무겁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말이 경솔하였다’라는 말은 ‘가볍다’, ‘빠르다’의 의미다. 고난은 무거운데 그에 비해 자신의 말은 너무 가벼웠다는 뜻으로, 고난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욥의 탄식은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으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욥 6:4-5)
욥은 자신을 하나님이 사냥하는 동물에 비유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과녁 삼아 독 묻은 고난의 화살을 쏘셨기에 자신은 독을 마신 것처럼 괴롭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불평하고 울부짖는 것은 들나귀나 소가 먹을 것이 없어서 울부짖는 것처럼 당연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욥 6:9).
여기서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는 ‘나를 끊어버리시기를 작정하셨노라’라는 의미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나를 멸망시키기를 기뻐하시는 분, 내 삶을 무너뜨리기로 작정하신 분으로 상정한다.
이것이 욥이 패역의 길로 나아가는 첫 번째 원인이다.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욥은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 성도를 멸망시키기를 즐거워하는 분이라고 상정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원수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욥은 이제 이렇게 결단을 한다. 이것이 잘못된 전제 두 번째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욥 6:10)
욥은 자신을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치셨음으로 자신이 고통당하고 있다고 탄식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기에 더더욱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고난 중에 끝까지 버티는 이유는 자신의 결백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려고 애써온 자신의 지난 삶이 고난으로 묻혀 죄인이 되는 것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 친구들을 향한 원망
이러한 자기변명과 자기방어 속에서 욥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친구들을 원망한다.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욥 6:14-15).
비가 올 때는 물이 넘쳐흐르나 건기가 되면 바닥을 드러내는 개울과 같이 자신이 풍요로울 때는 온갖 좋은 말로 함께하였던 친구들이 자신이 가뭄 때의 개천과 같이 모든 것을 잃자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을 조롱한다.
그리고 친구들을 향한 서운한 마음을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욥 6:21-22).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도와달라고 할까 봐 미리 거리를 두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욥이 친구들을 향해 이렇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4-5장의 엘리바스의 냉정한 말은 욥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욥 6:24-27).
욥은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판단하는 친구들을 친구를 배신하여 파는 무정한 사람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 속에서도 욥은 여전히 친구들의 지지를 호소한다.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욥 6:28-29).
3) 고통 속에서 지내는 삶
그러고 나서 욥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아픈지를 7장 1-6절에서 말한다. 낮에 수고한 자가 위로를 받는 것은 밤의 휴식이 있기 때문인데 자신은 낮에도, 밤에도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욥 7:1-3).
욥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살은 썩고 구더기가 살고 있었다(욥 7:5). 구더기가 초래한 염증으로 피부는 변형을 일으켰다가 결국 터지는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 욥은 자신의 삶을 희망 없는 인생이라고 탄식한다.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욥 7:6).
하나님을 향한 항변(7장 7-21절)
욥의 말이 이러한 탄식으로 끝났다면 오히려 다행이었을 것이다. 이제 욥은 하나님을 향해 직설적으로 불평하기 시작한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욥 7:11).
욥은 그동안 자신의 입을 금하여 하지 않은 말이 있었는데 이제는 참지 않고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그의 신앙 자체를 뒤집는 말들이 쏟아진다. 결국 그가 부정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일상의 은혜였다. 하나님을 원수로 바라보니, 하나님의 은혜 자체가 그에게는 핍박이고 간섭, 구속이었던 것이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지키시는 은혜를 거부한다. 하나님은 사탄이 질투할 만큼 욥의 삶과 소유를 지키셨다. 그러나 욥의 불평은 하나님의 이 지키심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욥 7:12).
둘째로, 그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불평한다. 꿈으로, 환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욥에게는 은혜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욥 7:13-14).
셋째로 욥은 하나님의 가르치심과 연단하심을 거부한다. 이것들이 훈련의 기회가 아니라 피하고 싶은 고난의 시간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8).
넷째로 욥은 하나님의 바라보심과 동행하심을 불평한다. 이것은 욥에게는 집착과 속박으로 여겨졌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 7:19).
욥이 입을 열어 불평하기 시작하자 이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모든 은혜는 구속이요, 간섭이요, 속박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왜곡된 고통으로 느껴질 때 그가 이르는 결론은 죽음이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욥 7:15-16).
그리고 이러한 불평과 절망이 마지막에 다다른 곳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욥 7:20).
욥은 자신이 범죄하였던들 하나님께 무슨 해가 되느냐고 항변한다. 이제 하나님과 나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인데 왜 나를 자꾸 이렇게 고난 속에서 붙들어 힘들게 하느냐는 것이다.
욥은 1장과 2장에서 대단한 믿음을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과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따지고 있다. 이 시작이 어디인지 보라. 그렇게 경건했던 욥이 왜 이렇게 변했는가.
이는 욥이 하나님은 나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분,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의 결백을 위해 이 고난을 이기고 말겠다고 결심한 마음에서 기인한 불신이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게 하였고, 자신의 생명을 거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였다.
성도는 고난 중의 아픔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탄식과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원망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성도의 탄식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될 수 있으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결국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구속과 간섭으로 여겨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패역에 이르게 된다.
맺음말
하나님은 성도를 진멸하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일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은혜를 주시려고 고난을 허락하신다. 그래서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그 성도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신다.
바울은 이 고난의 문제에 대한 답을 준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3-7).고난을 의미 있게 통과하여 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주셨던 위로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떤 고난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위로로 만나는 고난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