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까닭을 구하는 자의 슬픔
까닭을 구하는 자의 슬픔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욥 10:1-9)
8장에서 빌닷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욥은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신의 논리로 두 장에 걸쳐 말하는데 9장은 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답이고 10장은 하나님께 대한 욥의 탄원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욥의 항변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어떻게 자신과 같이 의로운 자가 고난당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불의한가?”
욥은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주시기에 불의하다고 말하며 누군가 재판을 열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 판결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전체적인 배경 아래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욥의 반박을 살펴보자. 먼저 9-10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욥기 9-10장의 내용 요약
1)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논쟁(9:1-24)
2)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9:25-35)
3) 욥이 하나님께 드리는 항변의 기도(10:1-22)
욥의 태도 변화: 자기 연민
엘리바스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강하게 항변하였다. 그런데 이제 태도를 바꾸어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말한다.
먼저 욥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다는 빌닷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는 듯 자신의 말을 시작한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2-3).
욥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빌닷의 주장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저항하기 위한 전략의 수정이었다.
욥은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고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보다 강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분임을 고백한다. 그렇게 강하신 하나님이 자신처럼 연약한 자를 학대하시고 폭력적으로 대하시니 내가 얼마나 불쌍하냐고 호소한다.
욥은 지금 자기 연민의 감정에 빠져 있다. 자신은 한없이 불쌍한 피해자로, 하나님은 강하고 무정한 핍박자로 바라본 것이다. 욥은 학대하시는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 두 가지를 말한다.
자연을 학대하시는 하나님
먼저 욥은 피조 세계를 학대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자기 연민의 감정에 빠져 자신의 고난에 집착하니 온 세상을 아름답게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도 핍박과 학대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욥은 4절과 10절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지혜가 있고 힘이 있어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욥 9:4),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욥 9:10).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을 그린 5-9절에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모두 부정적이다(5-9절). 산을 무너뜨리시고, 땅을 흔드시고, 해를 멈추시고, 별을 가두시고, 바다 물결을 밟으시고, 하늘 천체들을 가두시는 모습은 강한 힘으로 자연을 학대하시는 하나님, 폭력을 행사하시는 폭군의 모습이다. 자신이 삶이 괴롭고 아프니 모든 것을 왜곡된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욥 9:5-9).
욥을 학대하시는 하나님
욥은 그 강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도 학대하신다고 말한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욥 9:11-14).
내가 모르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행하시고, 핍박하고 빼앗고 진노하시고 굴복시키는 하나님의 모습은 흡사 폭군과도 같다. 욥은 자신은 이 고난 속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힘 없고 나약한 피해자임을 부각하여 말하고 있다.
이렇게 자연을 학대하시는 하나님, 욥을 학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두 가지 가정을 놓고 욥은 이제 자신의 의로움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한다. 15절과 20절에서 반복되는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라는 표현을 자신이 아무리 의로워도 결국 하나님의 학대와 폭력을 이겨낼 수 없다는 절망을 담고 있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욥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욥 9:20).
욥은 이렇게 하나님은 강하신 학대자로, 자신은 힘없는 피해자로 규정하며 이제 자신이 얼마나 부당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를 항변한다.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욥 9:17-19).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까닭 없이’ 당하는 핍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연민 속에서 욥은 또 한 번의 말실수를 하게 된다.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욥 9:22-24).
엘리바스의 말에 대해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하며 욥이 한 첫 번째 말실수는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까’라고 항의하는 것이었다. 이제 욥은 자기 연민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항한다. 하나님은 온전한 자나 악한 자를 함께 멸망시키시는 하나님, 학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개인을 향해서도 공의롭지 못하고 세상을 향해서도 공의롭지 못한 분이시라고 불평한다.
욥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역사하심까지 부인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욥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 시작은 자기 연민이었다. 고난 중 자기 연민에 빠지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학대하시는 무자비한 분으로 여겨지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폭력에 피해를 입은 가련한 피해자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자기 연민이 이끄는 절망과 원망
1) 자신의 삶 속에서 절망
욥은 자기 연민이 자신에게 위로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어떠한 위로도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절망을 가져왔다.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욥 9:29-31).
욥은 자신은 무죄하나 하나님은 없는 죄까지도 찾아 핍박하시는 분이심을, 자신을 아무리 정결케 하여도 욥을 개천에 빠뜨려 더러운 죄인으로 삼으시는 분이시기에 이제 나는 소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탄식한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2-33). 욥은 누구도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기에 자신은 참으로 소망 없고 불쌍한 피해자라고 탄식한다.
우리도 고난 속에서 자기 연민이라는 덫에 빠지면 결국 자신이 가장 불쌍한 피해자가 된다. 그리고 가해자를 찾기 시작한다. 욥은 그 대상이 하나님이었다.
2) 하나님을 향해 원망
자기 연민이 이끌어낸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욥 10:1). 이제 참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탄식 속에서 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이 고난 당하는 까닭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0:2).
여기서 ‘변론’은 ‘다투다’의 의미다. “무슨 까닭으로 나와 다투시는지 내가 알게 하옵소서.” 욥은 자신의 고난당하는 까닭을 물으며 깊은 슬픔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한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욥 10:3).
욥은 하나님을 학대하시는 하나님, 멸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여긴다. 그리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나이까’라는 구문을 통해 자기를 공격하는 친구들이 옳은 것인지를 하나님께 묻는다. 자기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니 하나님은 학대자이며 친구들은 악인들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죄와 허물을 고발하는 기소자 하나님
이렇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니 하나님은 없는 죄와 허물을 찾아내고 들춰내는 속 좁은 분으로 여겨졌다.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욥 10:6-7).
더 심각한 것은 죄가 없는데도 하나님은 들춰내시기에 자신은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다. 나의 죄를 찾으시는 하나님이 너무 두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드신 사람을 스스로 파괴하는 괴팍한 창조주로 여기게 되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욥 10:8-9).
욥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를 말하고 있다. 나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 그러나 짓밟고 괴롭히는 하나님, 나의 죄를 찾아 무너뜨리시려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두렵다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폭군
그러고 나서 욥은 하나님은 나를 계속 때리시는 폭군과도 같다고 다시 한번 불평한다.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욥 10:16-17).
자신은 젊은 사자에게 사냥당하는 가련한 동물과도 같고, 돌아가면서 자신을 공격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마치 군대가 바꿔가면서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게 되었다. 결국 자기 연민의 감정이 하나님을 가해자로, 핍박자로, 폭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연민은 결국, 욥의 삶에서 모든 소망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욥 10:18-22).
욥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 처음 시작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자기 연민이다. 자신은 아무런 소망 없고 힘없는 피해자로 바라보니 그때부터 모든 것이 싫었다. 이렇게 시작한 자기 연민은 고난을 믿음이 아니라 원망으로 마치게 하였고, 소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인도하였다.
고난을 당할 때 고난 자체에 주목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고난을 기준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고난 속에서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다.
맺음말
고난당할 때 성도는 아프다. 그때 어떤 사람은 자기 연민의 슬픔 속에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원망하고 자신의 삶을 저주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고난을 사명으로 바라본다. 이 고난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면 하나님도 세상도 나의 상황도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된다.
주님을 생각하라.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그 길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 길 끝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고 그 과정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이 있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야 한다. 사명을 주시면 반드시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고난을 사명의 길로 여기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