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관점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관점
“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욥 27:1-12)
4장부터 시작된 욥과 세 친구의 긴 대화는 본문으로 마친다. 고난에 대한 욥과 친구들의 입장은 첫 번째 대화 사이클에서 모두 제시되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에서는 새로운 내용은 없이 그저 서로를 억지와 모욕으로 저주하는 내용들만 가득하였다.
같은 말 다른 생각
25장은 친구들 중 빌닷의 마지막 말이고 이에 욥은 26장으로 답한다. 내용상으로 보면 빌닷과 욥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능력을 공통적으로 언급하나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른다.
25장(빌닷의 말)
2-3장: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적 통치
4-5절: 구더기, 벌레 같은 비천한 인간
26장(욥의 대답)
5-13절: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
14절: 인간의 무지
빌닷은 먼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위엄 있는 통치하심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빌닷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아니라 그 하나님에 비해 비천한 인간의 모습, 특별히 고난 중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의 비천함에 있다. 빌닷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욥을 구더기와 벌레 같은 인생이라고 조롱한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4-6).
우리는 빌닷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빌닷은 오직 욥이라는 사람이 비천한 존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이용하고 있다.
이에 욥은 빌닷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며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통치하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빌닷과 달리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통치하심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무지와 무능을 강조한다.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욥 26:12-13).
고대인들은 피조 세계에서 가장 혼돈스러운 곳을 바다라고 보았고, 그 바다를 전설 속의 피조물인 라합이 다스린다고 믿었다. 그런데 욥은 그 바다와 라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전능과 권세로 행하시는 일을 인간은 다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욥 26:14).
빌닷과 욥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적 통치하심이라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빌닷은 욥이라는 한 사람의 비천함과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해,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인간의 유한한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금 욥이 진짜 지혜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지혜를 누리는 사람의 가장 분명한 증거는 우리는 이 땅에서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고난을 바라보는 두 관점
욥은 이제 고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27장은 욥의 마지막 말이며, 또한 그의 결단이기도 하다.
성경은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풍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샬’로, 잠언을 의미한다. 그러니 정확한 번역은 ‘욥의 그의 잠언으로 말하되’이다. 이 말은 고난에 대한 욥의 지혜의 말이 담겼다는 의미다.
친구들의 회유와 설득, 협박에도 욥은 자신의 고난이 죄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억울해하였다. 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분명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원인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는 지혜를 얻었다. 27장은 그러한 욥의 생각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욥 27:2-4).
2절에서 욥은 두 가지를 고백한다. 하나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이다. 친구들과의 긴 대화를 통해 욥이 변화된 부분이 바로 여기다. 전에 욥은 하나님은 실수로 고난을 주신 학대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분을 전능자로 고백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의로운 욥에게 고난을 주었다는 사실은 성립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욥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서서히 찾아가고 있다.
우선 욥은 회복되기 위해 거짓으로 회개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욥 27:5-6).
그리고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욥 27:11-12).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하나님의 솜씨’라고 말한다. 히브리어 원어에 따르면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신 놀라운 일’이라는 뜻이다. 욥은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의로운 백성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풀어야 할 인생의 문제로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인간의 신학적 지식과 경험으로 답을 내리려는 친구들을 향해 ‘무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무익하다’는 ‘헤벨’이다. 욥은 헤벨을 한번은 동사로, 한번은 명사로 사용한다. ‘너희는 무익한 일을 무익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수학 공식처럼 풀 수 없는 인생의 문제
우리는 욥과 친구들의 대화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는 욥이 흥분하고 친구들은 침착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대화로 접어들면서는 친구들이 흥분하고 욥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친구들은 자신이 정해 놓은 기계론적 인과응보 결론에 따라 욥에게 숨겨진 죄가 있기에 고난을 받는다는 주장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욥은 처음에 자신의 고난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불공평함을 원망하였다. 그러다 이제 정해진 공식에 자신의 상황을 넣어 결론 내리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문제의 답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욥기의 결론에서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고 친구들을 책망하셨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 42:7)
인생의 문제를 공식으로 풀 것인가, 상황과 형편을 살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갈 것인가. 이것이 인간의 고난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맺음말
욥에게 고난은 정답 하나를 넣으면 끝나는 계산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며 통과해야 하는 인생의 신비였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은 고난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가는 방식을 이렇게 설명하신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욥 9:1-3).
제자들은 세 친구들과 동일한 논리를 펴고 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분명 누군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한 사람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밝히 드러내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이 실현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