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부활의 첫 증인
부활의 첫 증인(20260118)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0-18)
신약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여섯 명 나온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해서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바울이 로마서에서 문안한 로마 교인 마리아다. 이 여섯 명의 마리아 중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할 사람은 예수의 어머니와 막달라 마리아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의 소유로 주님을 섬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도 함께하였다. 예수님의 시체를 둔 무덤의 문이 닫히는 것까지 바라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도 마리아였다.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와의 이러한 친밀한 관계로 인해 그동안 교회 역사에는 온갖 억측이 존재하였다. 초대 교회 영지주의자는 예수님과 마리아가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 다빈치코드다.
분명 예수님과 마리아는 특별한 관계처럼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의 첫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셨을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 이유를 찾아보려 한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시대에도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시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
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 등장한 때는 갈릴리 호숫가의 ‘막달라’라는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면서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1-3).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랐으며,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필요한 것을 자신의 소유로 섬겼다. 그런데 그녀의 존재가 더욱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이 인기를 누릴 때가 아니라 멸시를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다.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매달리시는 순간에도 그분과 함께하였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예수님의 모든 장례를 지켜본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녀는 예수님의 시체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무덤에 놓을 때 무덤에까지 동행하였다.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막 15:46-47).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안식일이 끝난 새벽 미명에 예수님이 놓이셨던 무덤으로 가면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틀 전에 예수님의 시체가 놓인 무덤 앞에 돌이 옮겨져 무덤 문이 굳게 닫히는 것을 보았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요 20:1).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진 것을 본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에게로 달려갔다.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왔으나 그들은 빈 무덤을 보고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마리아만이 무덤 밖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마리아가 통곡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녀에게 나타났다. 이렇게 마리아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그분의 곁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첫 증인이 되었다.
부활의 첫 증인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다.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는가”이다.
당시 유대 관습에 의하면 여자는 법적인 증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마저 믿지 못하던 부활을 증거할 증인으로 법적 자격이 없는 이 여인을 선택하셨는가.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하던 기쁜 일을 겪게 되었다면, 오래도록 준비한 시험에 합격하였다면 그 소식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하겠는가. 아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 항상 나를 격려하고 걱정하는 사람, 이 소식을 가장 기뻐할 사람일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도 마찬가지다.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는가. 이 질문은 누가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애통해하였으며 또 누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 가장 기뻐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보자. 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심이 적기 때문이다. 누가 십자가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누가 부활의 소식을 기뻐할 것인지를 아시는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이 부활에 대한 세 가지 반응
성경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반응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격렬한 거부와 저항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기뻐하고 그분의 부활에 가장 큰 부담을 느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다(마 27:62). 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자신들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한다면 그들이 진짜 메시야를 죽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덤을 봉하고 파수꾼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텅 빈 무덤을 발견하였을 때 많은 돈을 주어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말을 퍼트리게 하였다.
이 시대에도 예수의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교회의 사기극으로 몰고 가는 반응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기쁨과 생명이 아니라 자신들을 향한 사형선고다. 이들은 마치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두려워하며 이를 부인하려 온갖 노력을 다한다.
2)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무관심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무관심이다.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무관심을 보인 사람이 바로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음을 전했다. 비록 마리아가 무덤 안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 새벽에 거대한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그렇게 짐작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향해 달려갔다. 먼저 도착한 요한이 무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무덤에 들어가 보고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요 20:6-7).
성경은 무덤이 비었다고 말하면서 세마포와 수건을 언급한다. 이는 유대 장례 문화를 이해해야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문장이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을 누이고 몸의 빈 공간에는 몰약과 향유를 채운다. 그리고 얼굴에는 수건을 덮고, 긴 세마포로 몸을 붕대처럼 감싼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는 예수님을 덮었던 수건과 천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것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만약 누군가 시체를 훔쳐가려 했다면 시체를 감싼 천을 일일이 풀지 않고 그냥 천이 감싸진 채로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몸이 마술과 같이 사라졌다면 몸을 감싼 천들은 어지럽게 놓여 있어야 한다. 이는 시체가 살아나서 몸을 감싼 천들을 풀고 정리하였음을 결정적으로 증거한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부활의 증거를 보고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이 두 사람은 인류 역사상 예수님의 부활 증거를 최초로 바라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
우리의 모습이 이 제자들과 같지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날마다 듣고 살아간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과 정리된 세마포를 보고도 아무런 기쁨과 감격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듣고도 통곡하지 않고 그분의 부활 앞에서 기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3) 부활에 대한 기대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후 한 여인이 여전히 빈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헬라어 성경은 제자들과 여인을 비교하기 위해 11절을 ‘그러나’로 시작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요 20:11).
마리아는 무덤에서 두 천사를 만난다. 천사들이 왜 우느냐고 물을 때 이렇게 답한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
이 말을 하고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를 동산지기로 착각한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요청한다.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음에도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 제자들과 예수의 시체를 찾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시체를 돌려달라는 마리아의 모습은 너무 상반된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 예수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분의 부활을 기뻐하는 자에게 나타나 이름을 불러주신다. 마리아에게 한 음성이 들렸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자의 음성이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요 20:16).
상실과 고통 속에서 목자가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양은 위로를 받았다.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를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의 부활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맺음말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처럼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실까 두려운가. 아니면 두 제자와 같이 부활의 증거가 날마다 우리 삶 가운데 있는데도 별다른 감격 없이 지내고 있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을 찾아오신다. 주님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이 없다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애통하는 눈물을 짓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신다. 목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우리로 하여금 실패와 상실의 삶을 이겨낼 능력을 준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경험해야 하는 부활의 능력이다. 부활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이겨나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