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통곡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통곡(20260329)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1-46)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한 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시려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다.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성으로 향하셨고, 수많은 인파는 예수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이스라엘의 왕이라 여기며 환호하였다. 그런데 성경은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니라 통곡하셨다고 기록한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우리는 예수님의 통곡의 울음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려고 한다. 우리 삶에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맞으러 오는 이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어쩌면 우리의 찬송과 환호를 들으며 통곡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의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도 있지 않은지 돌아보길 바란다.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는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통곡하시는 주님의 모습이다. 왜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는 자리에서 통곡하셨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기까지 기록한 성경을 쭈욱 살펴보아야 한다. 한 사건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앞과 뒤를 살펴 이 사건을 하나의 큰 흐름 속에서 바라보려는 것이다.
1) 예수님의 세 번의 울음
다른 복음서에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것이 주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기록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복음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왜 우셨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려 한다.
먼저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이 세 번 정도 나온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이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울음은 그 의미가 모두 다르다.
먼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의 예수님의 울음이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3-35).
마리아와 다른 유대인들의 울음은 헬라어로 ‘클라이오’로, 예수님의 울음은 ‘다크류오’로 기록되어 있다. ‘다크류오’는 소리 없이 공감하며 흘리는 눈물을 말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울음은 복음서가 아닌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통곡과 눈물이라는 표현에서 ‘눈물’은, 나사로의 죽음에서 보이신 주님의 눈물과 같은 표현이다. 그런데 ‘통곡’은 큰 소리의 울음이라기보다는 ‘큰 소리의 기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큰소리의 기도와 눈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펴볼 울음은 본문에 나오는 울음이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이 구절을 좀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이렇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 그 성을 보시면서 그 성을 위해 우셨다.”
여기서 사용된 ‘우셨다’라는 표현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죽은 나사로로 인해 울었던 단어, ‘클라이오’이다. 이는 한 사람의 죽음이나 멸망을 바라보면서 매우 큰 슬픔 가운데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에서 가장 슬프게 우셨던 때는 십자가에서도 아니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아니었다. 왕으로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였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예수님은 가장 슬픈 통곡의 울음을 쏟아내셨다. 그리고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예수님이 통곡하신 이유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베푸실 평화를 바라보지 못하는 예루살렘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천사들의 찬양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3-14).
그러나 이 평화는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환영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이다. 반대로 메시야를 환영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의 오심은 멸망이고 심판이었다. 주님은 평화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한 예루살렘이 맞이할 멸망을 날을 이렇게 설명하신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눅 19:43-44). 이 예언은 놀랍게도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그대로 실현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평화로 오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4下).
이 구절은 주님의 통곡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주요한 구절인데 한글 성경은 ‘보살핌 받는 날’이라고 번역하면서 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해야 하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왜냐하면 너는 너의 (하나님의) 방문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이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방문하시는 그때를 예루살렘이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온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고, 그들은 결국 평화를 버리고 멸망을 선택하게 되었다.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
이러한 선택의 중요성을 설명하고자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다른 복음서와는 조금 다르게 기록한다.
먼저 예루살렘 입성 직전 오직 누가복음에만 열 므나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왕위를 받기 위해 한 귀인이 떠나면서 종들에게 열 므나를 맡겼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달란트 비유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결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눅 19:14).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눅 19:26-27).
28절은 열 므나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목적이라는 것을 강하게 보여준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눅 19:28).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결국에는 밝히 드러날 것이고, 왕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다시 한번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환호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환호를 받으며 성으로 들어간 주님은 불과 일주일 만에 가장 큰 비난을 받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다. 호산나를 외치며 그들의 왕이라고 환호하던 사람들이 불과 며칠 만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폭력의 외침을 쏟아내게 된다.
그렇기에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사건 앞에 열 므나의 비유를 기록한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할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한 왕의 분노를 다루고, 그들이 당할 멸망을 미리 바라보시고 슬퍼하는 왕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이미 사역 초기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3:34-35).
반복되는 예루살렘의 파괴
예수님의 통곡이 더욱 슬픈 것은 하나님의 오심을 거부하여 멸망 당한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이자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 당한 사건을 알고 있다. 그때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하나님의 슬픔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렘 8:2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하나님보다 우상을 섬기는 선택을 함으로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했던 예루살렘이 또다시 찾아오신 하나님의 메시야를 거부하고 이번에는 로마 군인들에게 의해 잔인하게 멸망 당할 것을 바라보며 주님은 통곡하며 우셨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왕으로 오시는 길에서 우리는 그분을 왕으로 모실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방식으로는 환영하지만 어느 순간 그분이 우리의 기대와 다를 때는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있다.
솔로몬 성전의 멸망을 앞두고 통곡하였던 하나님의 탄식이 그대로 재현된 것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에서이다. 예수님은 성전을 방문하시어 그곳을 돈과 우상으로 더럽힌 예루살렘을 향해 분노하셨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5-46).
이 분노는 이미 600년 전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렘 8:19).
하나님이 예루살렘 시온산에 왕으로 계시는 중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겼다. 그들은 풍요와 부귀를 섬김으로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고 그 분노가 결국 그들에게 심판으로 임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주님의 모습은 이미 600년 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시온산에 거하셨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이 평화의 왕으로 오심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멸망 당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멸망 당할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맺음말
주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오신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오셔서 우리가 영원한 왕이신 주님을 우리 삶 가장 중요한 자리에 영접하는지,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지, 나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어놓는지 끊임없이 살피신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평화를 이 땅에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영원한 나의 왕으로 고백할 때 우리의 영혼은 평화를 누린다. 이러한 평화 가운데 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